이은미, 자연의 흔적에서 존재의 깊이를 길어 올리다

갤러리 담 기획전 ‘낮과 옆’, 신작 17점 선봬
색채와 붓질로 생명의 순환과 존재의 의미 탐색

박종진 기자

krbdm21@gmail.com | 2026-10-26 13:40:36


[SWTV 박종진 기자]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이 남는다. 순간적으로 반짝이다 사라지는 빛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은 인간의 삶과도 닮아 있다. 
 
이러한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을 화폭에 담아내며 존재의 의미를 탐구해온 이은미 작가는 기획전 ‘낮과 옆(Day and Beside)’이 이달 23일부터 내달 3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 담에서 열린다.
 

▲ 이은미 작 'Day and Beside'.
 
이번 전시는 자연의 외형을 재현하기보다 그 안에 스며 있는 감각과 기억, 생명의 기운을 회화적으로 풀어낸 자리로, 일상의 산책과 자연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제작한 신작 17점을 선보인다.
 
이은미의 작품에서 자연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빛과 어둠, 생성과 소멸, 움직임과 정지가 교차하는 생명의 공간이자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작가는 눈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그 대상과 마주한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정과 기억, 보이지 않는 기운을 화면에 옮긴다.
 
부드러운 파스텔 계열의 색채와 흐르는 듯한 붓질, 명확한 윤곽을 드러내지 않는 형상은 이러한 작업의 특징이다. 나무와 풀, 구름과 바람은 구체적인 자연물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내면과 결합한 추상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이어온 회화적 탐색을 바탕으로 대상의 구체적인 형상보다 순간의 감각과 정서, 존재의 흔적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빛과 바람이 남긴 흔적…자연의 형상을 넘어 내면의 풍경으로
 
이은미의 작업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작업실 주변의 공원을 걷거나 길가의 가로수와 화단을 바라보며 자연의 작은 변화를 관찰한다. 같은 장소, 같은 나무라도 빛의 방향과 바람의 움직임, 계절과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러한 순간들을 단순한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움직이는 감각적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이은미는 작가노트에서 “빛이 통과하여 진동하는 순간, 아직 이름 붙기 전의 그 떨림이 내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밝힌다. 자연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빛과 시간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반복되는 변화 속에서 자연이 지닌 고유한 질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외형을 충실히 재현하는 대신 빛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미세한 흔적을 화면에 축적한다. 그렇게 겹쳐진 색채와 붓질은 특정한 풍경을 넘어 시간과 기억이 공존하는 하나의 공간을 형성한다.
 

▲ 이은미 작 'Day and Beside'. 
이번 전시에 출품된 ‘해에게’는 저물녘 숲의 능선 위로 떠오른 달을 통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아낸다. ‘검고 푸른 시간’에서는 짙은 색채의 중첩을 통해 시간의 깊이와 정서를 표현한다. ‘그 중에 하나’와 ‘떨어지고 있다’는 자연의 작은 부분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흔들리는 붓질과 색채를 통해 순간의 움직임을 드러낸다.
 
울타리 너머 피어오르는 구름을 담은 ‘울타리 밖에도’, 어두운 형상 속에서 붉은 기운이 스며 나오는 ‘충분하다’ 역시 자연의 구체적인 모습보다 그 안에 깃든 감각과 정서에 주목한 작품이다. ‘해변에 새긴다’와 ‘무엇이 되어간다’에서는 형태의 경계가 더욱 유연해지면서 색채와 붓질 자체가 중요한 표현 요소로 등장한다.
 
이러한 작업은 이전 작품과 단절된 새로운 양식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이어온 자연에 대한 관찰과 내면적 사유가 한층 깊어진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은미 작가는 이번 작업에 대해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맞고 있다고 말한다. 이은미의 이전 작품에서는 구체적인 대상의 윤곽을 흐리거나 형태를 단순화하면서 색채와 감정의 표현을 강조하는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의 형상에 내재한 추상적 요소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자연을 그리는 과정이 곧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나무와 물, 하늘과 공간을 바라보면서 외형 너머에 존재하는 의미를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김춘수의 시 ‘꽃’을 언급하며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존재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듯, 자신 역시 자연의 구체적인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고 싶다고 설명한다. 이는 관람객에게 하나의 정해진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려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사라지면서도 남아 있는 존재…생명의 순환과 시간의 울림
 
이은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존재와 소멸,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다. 작가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생명의 순환을 발견한다. 빛은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고, 바람은 흔적을 남긴 채 지나간다. 꽃과 나무 역시 피어나고 성장하며 소멸하지만 자연의 질서는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자연의 순환은 인간의 유한한 삶과도 맞닿아 있다. 이은미는 작가노트에서 마음의 평정을 잃거나 작업의 어려움을 겪을 때 산책을 통해 자연의 질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 작업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자연을 향한 그의 시선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존재의 덧없음에서 비롯되는 허무의 감정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허무는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라지는 순간에도 고유한 빛과 흔적을 남기는 존재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 이은미의 전시작을 감상하는 관람객
 
박겸숙 미술평론가는 이은미의 예술세계의 특징을 존재와 소멸의 관계로 분석한다. 이은미가 바라보는 자연이 단순한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작가의 기억과 감정, 시간의 흐름이 중첩되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빛의 출현과 사라짐은 생명의 유한성을 드러내면서도 완전한 소멸로 끝나지 않는 존재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은미의 회화에서 허무는 모든 것이 사라진 공백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또 다른 의미가 생성되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사라진 빛은 기억으로 남고, 지나간 시간은 색채와 붓질의 흔적으로 축적된다. 이러한 흔적들이 서로 겹치면서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미세한 진동을 시간과 기억, 존재가 결합한 복합적인 현상으로 표현한다. 이는 이은미의 회화가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탐색하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이은미의 작품에서 가시적인 자연과 비가시적인 감정이 공존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연에서 받은 감수성을 색채로 전환하고, 흐르는 듯한 붓질을 통해 자연의 움직임과 자신의 내면을 함께 드러낸다는 것이다.
 
특히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하는 붓질은 나무와 풀, 꽃과 구름을 암시하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을 확정하지 않는다. 관람자는 화면에서 자연의 모습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안에 스며 있는 작가의 감정과 사유를 느끼게 된다.
 
박 평론가는 이은미의 회화를 눈에 보이는 자연과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기운을 함께 표현하려는 시도로 해석한다. 색채와 붓질이라는 회화적 요소를 통해 시간과 기억, 생성과 소멸이라는 철학적 사유가 화면에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은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언제나 변화하고, 그 변화 속에서 인간 역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한다.
 
과거의 작업에서 인간의 부재가 느껴지는 건물과 공간을 통해 내면의 정서를 표현했다면, 이후에는 빛과 바람이 스며드는 자연으로 시선을 넓혀왔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의 구체적인 형태보다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감정, 존재의 흔적을 더욱 깊이 탐색하는 자리다.
 
이은미의 회화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돌아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생명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빛과 바람이 지나간 자리, 형태가 희미해진 자연의 풍경 속에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이자 인간의 삶이다.
 
이번 ‘낮과 옆’ 전시는 오랫동안 이어온 자연에 대한 관찰과 존재에 관한 사유가 색채와 붓질의 중첩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이는 풍경과 보이지 않는 감정, 사라지는 순간과 남겨진 기억이 어우러지면서 이은미 특유의 조용하고 섬세한 회화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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