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철학, 정진국의 30년 탐구로 재발견
근대건축 거장 관통하는 10가지 이론 집대성…‘창조와 사유’·‘일반화’ 두 권 출간
11월 5~15일 토포하우스서 ‘이론적 실천’전…건축 모형·설계 자료로 사유와 창작의 관계 조명
박종진 기자
krbdm21@gmail.com | 2026-11-04 00:09:21
[SWTV 박종진 기자]20세기 건축의 패러다임을 바꾼 르 코르뷔지에(1887~1965)는 건축을 단순히 건물을 짓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사회를 재구성하는 예술적·지적 실천으로 인식했다.
▲'건축가 정진국의 이론적 실천' 전시 전경
그의 건축세계는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하학적 질서를 강조한 초기 주택과 유기적인 곡선으로 종교적 숭고함을 구현한 후기 건축 사이에는 형태상의 차이를 넘어 예술과 인간, 공간의 본질에 관한 지속적인 탐구가 존재한다.
건축가이자 건축역사가, 교육자로 활동해 온 정진국 한양대 건축학부 명예교수는 이러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사유를 30여 년간 연구해왔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학문적 탐구를 두 권의 저서로 정리하고, 자신의 건축 작품과 연구 자료를 함께 선보이는 전시를 마련했다.
‘건축가 정진국의 이론적 실천’전은 5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 제2전시실에서 열린다. 건축을 둘러싼 이론적 사유가 실제 공간과 형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는 자리다.
10가지 이론으로 재구성한 30년 연구…건축의 ‘격’을 묻다
이번 전시는 정진국이 최근 출간한 저서 두 권과도 맞닿아 있다. 수류산방에서 펴낸 '창조와 사유, 르 코르뷔지에 정진(精進): 격(格)의 건축을 향한 르 코르뷔지에의 열 가지 이론'은 30여 년에 걸친 르 코르뷔지에 연구를 집약한 책이다.
정진국은 1993년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예술사학자 위베르 다미쉬의 지도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다색채’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건축과 회화, 도시계획, 저술을 아우르는 방대한 작업을 추적하면서 그의 사유를 관통하는 원리를 탐구했다.
▲'창조와 사유, 르 코르뷔지에 정진(精進): 격(格)의 건축을 향한 르 코르뷔지에의 열 가지 이론' 표지.
이번 저서는 그 성과를 ‘새로운 정신’, ‘거주 기계’, ‘건축 5원칙’, ‘건축 4구성’, ‘빛나는 도시’, ‘형언불가의 공간’, ‘모뒬로르’, ‘기적의 상자’, ‘열린 손’, ‘점진적 탐구’ 등 열 가지 이론으로 재구성했다. 각각의 개념은 개별 건축물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르 코르뷔지에가 평생 추구한 예술적 이상과 그 변화를 읽어내는 사유의 틀로 기능한다.
특히 정진국은 젊은 시절 르 코르뷔지에가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 주목한다. 고대 건축이 지닌 비례와 조화, 구축의 질서를 급변하는 20세기 사회에서 어떻게 새롭게 구현하려 했는가가 그의 건축을 이해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부아 저택의 정제된 기하학과 롱샹 성당의 자유로운 조형은 단절된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이상을 향한 서로 다른 접근으로 해석된다.
책 제목의 ‘정진’ 역시 의미심장하다.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은 완성된 정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 정진국은 그 여정의 궁극적인 지향을 건축의 ‘격(格)’, 곧 축조 예술로서 건축이 지닌 고유한 존엄성과 연결한다.
또 다른 저서 '일반화'(바이블랭크)는 정진국 자신의 건축적 사유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건축 형태의 구축에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귀납적 탐구를 강조하면서 내부와 외부, 공간적 연속성, 조형 음향학, 수평선과 통합 등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병산서원과 만대루, 풍수사상 등 한국의 전통적 공간 인식을 함께 검토한다는 점에서 서구 근대건축의 이론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서로 다른 건축문화의 원리를 비교하며 보편적인 조형질서를 탐색하려는 태도가 읽힌다.
연구에서 설계로…건축적 사유의 실천을 보여주다
정진국의 건축세계에서 이론과 실천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연구하는 일은 건축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이면서 자신의 설계에 적용할 원리와 방법을 검증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건축가 정진국의 이론적 실천' 전시 전경
이번 전시는 이러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정진국이 1991년 파리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제작한 라로슈-잔레 주택, 스타인-드몬지 저택, 베조 저택, 사부아 저택 등 르 코르뷔지에 건축 모형 4점이 소개된다.
여기에 정진국이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계한 건축 작품 모형 10점과 패널 14점이 함께 전시된다. 근대건축 거장의 공간구성을 분석했던 연구자의 시선이 자신의 건축적 언어로 어떻게 전환됐는지 살펴볼 수 있다.
정진국의 주요 설계작으로는 곤지암 주택(2005), 토포하우스(2005), 상동 갤러리주택(2023) 등이 있다. 1996년과 2005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부터 한양대학교 건축학부에서 후학을 양성해왔다.
그의 연구는 서구 건축가의 이론을 한국에 소개하는 학문적 작업을 넘어, 건축의 형태가 어떤 사유와 원리에서 비롯되는지를 추적하고 이를 실제 설계의 문제로 연결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르 코르뷔지에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양면적이다. 현대적 주거와 도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지만, 합리성과 효율성에 치중한 건축이 인간의 삶을 획일화할 수 있다는 문제도 남겼다. 따라서 그의 건축을 다시 읽는 일은 근대건축의 성취를 기리는 동시에 그 한계와 오늘날의 의미를 재검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정진국의 30여 년 연구가 던지는 질문 역시 여기에 맞닿아 있다. 건축은 기능적 요구를 해결하는 기술에 머무르는가, 아니면 인간과 사회, 자연과 예술의 관계를 새롭게 조직하는 창조적 사유인가.
이번 저서와 전시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실험을 통해 그 질문을 다시 제기하면서, 이론이 실제 건축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함께 조명한다.
한편 정진국은 7일 오후 4시 토포하우스 지하 1층 세미나실에서 ‘정진국, 르 코르뷔지에를 말하다’를 주제로 강연한다.
[ⓒ SWTV. 무단전재-재배포 금지]